이혜임 작가 “제주 바람과 흙으로 돌아가는 ‘무해(無害)의 예술’을 향하여”

-제주의 자연과 캔버스에 새겨 넣은 온기와 연대의 기록

-찰나의 흔적을 영원으로 잇는 생태와 조형의 호흡

 ◇제주의 자연과 일상, 화폭 위에 얹은 신선한 조형적 시도

스프레이와 붓, 나이프, 그리고 두터운 질감의 물감을 화폭에 얹어 제주의 삶을 담아내는 이혜임 작가의 행보는 그 자체로 기존 회화의 틀에 신선한 균열을 낸다. 자유로운 스프레이 기법과 믹스드미디어를 활용해 제주의 현무암과 바람의 결을 캔버스 위로 끌어들인 그의 시도는, 예술이 제주의 대자연을 만났을 때 일어나는 시각적 해방감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그동안 제주의 낯선 자연을 탐색하는 데 몰두해 왔다면, 이제 그의 작업은 완연한 ‘제주의 관찰자이자 이웃’으로서의 깊은 시선을 담아내고 있다. 물리적인 탐색을 넘어 정신적 동화를 이뤄낸 그의 작업실은 이제 섬의 외곽이 아닌, 제주의 역사와 주민들의 일상 한가운데로 깊숙이 들어와 있다.


“처음 제주에 왔을 때는 바람을 이겨내거나, 그 바람이 만드는 우연에 감탄하기 바빴다. 일종의 탐험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 바람이 어디서 불어와 누구의 밭을 거쳐 가는지 생각하게 된다. 작업 역시 나를 보여주는 것에서 이 땅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쪽으로 자연스럽게 흐르고 있다”

◇마티에르와 도상으로 응축해 낸 제주의 생명력과 내적 기록

이러한 내면의 변화는 그의 작업 태도와 화면 위 질감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야외 공간의 기운이 지역 주민들과 호흡하는 ‘외적 연대’라면, 캔버스 위에 두텁게 올려진 마티에르(질감)와 차분히 얹힌 꽃, 개구리, 달과 별 등의 도상들은 제주의 생명력을 화폭 깊숙이 응축해 낸 ‘내적 기록’이다.


과거 바람을 '공동 작업자'로 삼아 몽환적인 스프레이 페인팅을 즐겼다면, 최근 작업은 붓과 나이프가 조화를 이루며 한층 정교해진 동시에 흙냄새와 대지의 온기를 짙게 풍긴다. 제주의 흙과 돌,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온 삶의 숨결이 그의 손끝에서 새로운 조형적 서사로 치환되고 있는 것이다.

◇‘찰나의 예술’이 영원이 되는 순간... 생태적 고민과 디지털 아카이빙

야외 및 자연 속에서 펼쳐지는 표현 형태는 필연적으로 소멸을 운명으로 타고난다. 비바람에 씻겨 가고, 뜨거운 햇볕에 바래며 변형되기도 한다. 이혜임 작가 역시 이러한 ‘일시성’을 작업의 주요한 속성으로 꼽아왔다.


그러나 제주에서의 시간이 깊어질수록, 그는 이 찰나의 예술을 기록하고 공유하는 방식에 대해 더 깊은 고민을 시작했다. 시공간적 한계를 극복하고, 제주의 자연과 무형의 문화유산을 현대 예술의 틀 안에서 보존하기 위한 ‘디지털 아카이빙’과 ‘화폭 속 수놓기’라는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서다.


이와 동시에 그는 ‘생태적 지속가능성’에 대해서도 치열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페인트나 유기용제가 유발할 수 있는 환경오염에 대한 자각에서 출발해, 최근에는 천연 안료와 친환경 고착제를 활용한 미술 및 미디어 기법을 적극 연구 중이다. 제주의 자연을 빌려 쓰는 예술가로서, 자연에 해를 끼치지 않는 완전한 ‘무해(無害)의 예술’을 지향하겠다는 다짐이다.


“제주가 영감을 주는 만큼, 나 역시 이 섬에 상처를 남겨서는 안 된다. 바람이 불어 페인트가 벗겨지더라도, 그 가루가 흙으로 돌아가 자연의 일부가 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 가장 인공적인 도구마저 가장 자연 친화적인 매체로 바꾸는 것, 그것이 나의 다음 도전이다”


◇편견의 벽을 허무는 ‘낮은 곳의 연대’

이혜임 작가의 발걸음은 늘 예술과 일상의 경계가 마주치는 친근한 낮은 곳으로 향한다. 규격화된 전시 공간의 문턱을 허물고 누구나 쉽게 교감할 수 있는 화폭을 제시하는 것, 그리고 작품을 통해 관습적인 편견과 마음에 쌓인 벽을 낮추는 것이야말로 이혜임 작가가 제주에서 증명해 내고 있는 작업의 진가다.


“작업의 본질은 결국 목소리가 없는 자들의 목소리가 되는 것이다. 세상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자 화면을 채우던 예술가들의 열망과, 평생 제주라는 척박한 땅을 일구면서도 묵묵히 삶을 견뎌내신 이곳 어르신들의 숭고한 세월은 닮아 있다. 이 작품들은 그들의 삶에 바치는 헌사이자, 잊혀가는 공간과 순수한 생명력이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이혜임 작가가 캔버스 위에, 그리고 공간 속에 그어 내려가는 선과 색채들은 자연과 인간, 도시와 로컬, 그리고 예술과 일상 사이에 놓인 깊은 골을 메우는 연대의 다리다.


결실의 계절, 땀방울을 흘리며 가을볕 아래 또 다른 화폭을 마주하고 있을 그의 손끝에서 어떤 새로운 제주의 숨결과 무해한 꽃들이 피어오를지 그 따뜻한 행보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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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2026.10.01 15:11 수정 2026.10.01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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