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빌립보 교회하면 무엇이 떠오르십니까? 바울이 본 환상 아닙니까? 제2차 복음 전도를 앞에 두고 바울과 바나바가 다퉜습니다. 그냥 말다툼이 아니라 치열하게 얼굴을 붉히며 싸웠습니다. 그전까지 두 사람은 둘도 없는 동역자였습니다. 앞서가고 뒤에서 밀어주는 그야말로 보기 좋은 동역자였습니다. 그런데 바나바가 마가 요한을 추천하자 확 달라졌습니다. 그렇게 두 사람은 각기 자기 갈 길로 떠나게 됩니다. 어쩔 수 없이 바울은 전도팀을 새롭게 보강합니다. 다행히 예루살렘 교회에서 섬기던 실라가 동참합니다. 바나바를 대체한 절묘한 조력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또 다른 한 사람이 추가됩니다. 그가 곧 젊은 청년 디모데입니다.
바울 사역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딱 한 사람이라면 누구겠습니까? 그가 바로 디모데 아닙니까? 바울 주변엔 늘 다양한 조력자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디모데는 그야말로 단 한 사람인 "One Man"입니다. 그래서 디모데에게는 다양한 수식어가 따라다닙니다. 그중 하나가 바울에게는 믿음으로 낳은 아들이었습니다. 할례 문제로 한바탕 소동이 일었습니다. 예루살렘 총회는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 소집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이방인은 굳이 할례받을 필요가 없음을 천명합니다. 할례 무용론은 결국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님을 믿는, 그 믿음 밖에는 없습니다. 한동안 교회가 할례 문제로 시끄러웠습니다. 하지만 예루살렘 총회는 정확하게 구원 교리를 제시했습니다. 돌아보면 바울 복음은 언제나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이었습니다.
그 바울이 전도팀에 디모데를 합류시켰습니다. 더구나 이를 위해 디모데에게 할례까지 행했습니다. 디모데는 어머니가 유대인인데도 할례를 받지 않았습니다. 왜냐면 아버지가 헬라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대 출신 신앙인이면서도 할례받지 않은 특이사례입니다. 그가 전도팀에 합류하자니 주변 유대인들 시선이 따갑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뒤늦게 할례를 행했습니다. 사실 할례는 태어난 지 팔일째 되는 날에 베풉니다. 그러니 성격상 할례받는 자에게서 동의를 구하지 않은 비자발적 행위입니다. 그런데 디모데는 성인이 되어 할례를 받습니다. 다시 말해 바울은 디모데에게서 동의를 구한 후 할례를 행했습니다. 할례는 본질상 비자발적 행위인데 디모데 경우는 자발적 행위가 된 셈입니다.
분명 바울은 할례와 구원은 전혀 상관관계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왜 디모데에게 굳이 할례를 행하면서까지 그를 데려가려고 했습니까? 아무래도 바울이 계획한 아시아 복음화에 최적화된 인물이라는 확신 때문입니다. 그래서 디모데는 극한 고통까지 감내하며 할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웬일인지 하나님은 바울 계획을 비틀어버립니다. 바울이 아무리 강하게 기도해도 하나님은 꿈적도 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아니라고 강력하게 방향을 틀었습니다. 하다하다 바울에게 환상까지 보여주셨습니다. 바울은 그 환상을 보자마자 기도를 접었습니다. 그동안 수도 없이 기도해 왔던 아시아 복음화, 그 꿈을 내려놓습니다. 철저하게 하나님 뜻에 순종하고자 방향을 바꿨습니다. 그렇게 급선회한 지역이 마케도니아입니다.
하나님은 바울에게 환상을 하나 보여주었습니다. 꿈에 마케도니아 사람이 나타나 바울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그 환상을 근거로 바울은 아시아를 떠나 유럽으로 선회합니다. 그렇게 마케도니아 첫 성이며 로마 식민지인 빌립보에 당도합니다. 로마 식민지란 로마 황제에게 속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빌립보는 로마법이 통용되는 자치도시인 셈입니다. 그래서 빌립보는 로마 사람이 절반을 훌쩍 뛰어넘습니다. 다시 말해 빌립보는 마케도니아에 있는 작은 로마였습니다. 로마와 비슷한 게 아니라 아예 로마 그 자체였습니다. 어쩌면 빌립보와 비슷한 사례가 영국 런던 아닐까 생각됩니다. 런던 역시 로마 축소판이라 해도 괜찮을 만큼 닮은꼴 아닙니까?
자, 그래서인지 바울은 빌립보에 도착하자마자 헤매이기 시작합니다. 바울 일행은 빌립보에서 여러 날 유했다(행 16:12)고 했습니다. 이는 바울 일행이 빌립보 이곳저곳을 누비며 다녔다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복음을 전했다는 뜻은 전혀 아닙니다. 빌립보를 읽고 알아가기 위한 체험 과정이었다고 보입니다. 바울이 빌립보에서 어떤 식으로 복음제시를 했는지 불분명합니다. 거의 침묵에 가까울 정도로 복음 전하기를 주저했습니다. 간간이 복음을 전한 듯하나 이 또한 소극적 대응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속 시원한 복음제시는 교도관에게 전한 말이 전부입니다(행 16:31).
솔직히 바울은 빌립보에서 기도 말고는 딱히 한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빌립보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바울 사역 평생에 물질로 동역한 둘도 없는 교회입니다. 그러니 빌립보 교회 설립 이면사가 더더욱 궁금해집니다. 과연 빌립보 교회는 어떻게 세워졌습니까?
빌립보 교회 설립과 연관된 두 가정을 보십시오(행 16:15, 33). 한 가정은 두아디라 태생의 장사꾼인 루디아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한 가정은 바울을 가두었던 교도관입니다. 그런데 솔직히 두 가정은 그 어떤 접점도 없습니다. 두 가정은 모두 바울에게서 식솔 모두가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런 만큼 빌립보 교회 연관성이 누구보다 높은 두 가정입니다. 그래서 두 가정이 과연 하나 된 교회로 작동했을까도 정말 궁금합니다. 왜냐면 두 가정은 민족 정체성이 너무도 달랐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세례받은 두 가정이 예배 모범도 배웠는지는 불확실합니다. 무엇보다 교회는 예배하는 공동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과연 빌립보 교회는 어디에서 어떻게 예배를 배웠습니까?
바울이 가르친 예배 모범은 다름 아닌 지하 감옥에서였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차꼬에 매인 채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송합니다. 어떤 이는 기도는 슬프고 괴로울 때 한다고 했습니다. 찬송은 반대로 기쁠 때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기도는 가능한데 찬송까지 했다니 의외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기도와 찬송이 하나로 어울린, 그 장면이야말로 예배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어떤 교회든 예배는 기도와 찬송이 교차하며 진행됩니다. 그러니 지하 감옥에서 바울과 실라가 예배했다고 하면 됩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저자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송했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예배라고 하면 될 일을 굳이 예배 요소인 기도와 찬송으로 말합니다. 이는 아무래도 예배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강론이 빠졌기 때문이라고 보입니다. 사도행전 저자는 누구보다 예배에 민감한 분입니다. 그래서 그 상황이 예배임에도 예배란 말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송했다고 하는 방향성만 남겼습니다. 그러니 무엇이 빠졌기에 예배란 말을 감히 사용하지 않았는지 성찰해야 합니다.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무엇이겠습니까? 기도와 찬송도 분명 소중합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소중한 한 요소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말씀 선포입니다. 그 요소가 빠진 예배 상황이기에 기도하고 찬송했다고만 전합니다. 그런데도 지하 감옥 전체가 뒤흔들립니다. 옥문이 모조리 풀리는 놀라운 일도 나타납니다. 하지만 그보다 기도와 찬송을 듣던 죄수들 마음입니다. 그들은 너무도 차분했습니다. 그리고 모두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습니다. 그렇게 한 가정이 회심하는 놀라운 변화로 이어집니다. 빌립보 교회가 간직한 진리는 너무도 단순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 16:31)
이 모든 상황이 빌립보 교회 초기 성도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전부입니다. 바울 일행은 감옥에서 나온 후 곧바로 빌립보를 떠납니다. 그러니 양육은 고사하고 교회 설립 시점조차 애매합니다. 그런데도 빌립보 교회하면 또 떠오르는 말씀이 무엇이겠습니까? 빌립보 교회는 복음 하나면 충분하다는 삶을 증언합니다. 하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오늘 우리 교회는 어떻습니까? 진리는 어느 시대건 단순 명료함을 잊지 마십시오.











